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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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80년 6월 22일에 실시되었다. 오히라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 가결로 중의원이 해산되면서 치러졌으며, 제1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와 같은 날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이 284석을 얻어 압승하였고, 스즈키 젠코 내각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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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거 데이터
1980년 5월 16일, 일본 사회당이 제기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1980년 6월 2일에 선거가 공시되었고,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1980년 6월 22일에 투표가 실시되었다.[11]
이 선거는 직전 총선거로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실시된 것으로, (제25회 총선거부터 바카야로 해산까지 약 6개월에 이은) 매우 짧은 기간 만에 치러진 선거였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중참 동시 선거로 치러졌다.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에는 현직 내각총리대신인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3][4][5] 오히라의 사망으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총사퇴하고, 직무집행내각으로 이행했다.[7][8]
의석수는 511석이었으며, 선거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2. 1. 내각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자민당 내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나카가와 히데나오 계파 등의 반란표로 인해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자,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여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중의원 의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11]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 현직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국 헌법 제70조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 처음으로 국회가 소집될 때 내각이 총사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3] 이는 총선거로 새롭게 구성된 중의원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이다.[12] 한편, 같은 조항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이 궐위되었을 때에도 내각이 총사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14][15]
이에 따라 중의원 해산부터 국회 소집 시까지 내각총리대신이 궐위된 경우, 즉 총사퇴 사유가 중복되는 경우에 대한 헌법 해석상 논란이 있었다. 즉시 총사퇴해야 한다는 학설과 국회 소집 시까지는 총사퇴할 필요가 없다는 학설이 대립했다.[16]
6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의 급서 당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당일 총사퇴하고 국회 소집 시에는 총사퇴하지 않았다.[7] 이는 내각총리대신 궐위 시점에서 이미 총사퇴했으므로 국회 소집 시에 다시 총사퇴할 필요가 없다는 해석을 따른 것이다.[8]
오히라의 선거 기반에서는 그의 사위이자 제1 비서였던 모리타 하지메가 보충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선거 후에는 스즈키 젠코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
2. 2. 중의원 해산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자유민주당 내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나카가와 히데나오 계파 등의 반란표로 인해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었다. 이에 내각은 중의원 해산을 단행, 예정돼있던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중의원의원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11]이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에 현직 수상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사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본국 헌법 제70조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 처음으로 국회가 소집될 때 내각은 총사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총선거로 새 중의원이 구성되면, 같은 사람이 총리대신으로 지명되더라도 내각은 새 신임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이다.[12][13] 한편, 같은 조항은 내각총리대신이 없을 때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규정한다.[14]
이에 따라 중의원 해산부터 국회 소집 시까지 '내각총리대신이 없을 때'가 되면(총사퇴 사유 중복)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헌법 해석상 논란이 있었다. 국회 소집 시까지 총사퇴를 미뤄야 한다는 학설과 즉시 총사퇴해야 한다는 학설이 대립했다.[15] 6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 급서 당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당일 총사퇴하고 국회 소집 시에는 총사퇴하지 않았다.[16] 이는 내각총리대신 부재 시 즉시 총사퇴해야 하며, 이미 총사퇴했으므로 국회 소집 시 다시 총사퇴할 수 없다는 해석을 따른 것이다. 오히라의 선거구에서는 사위이자 제1 비서였던 모리타 하지메가 보충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1980년 5월 19일은 해프닝 해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0년 5월 16일, 일본 사회당이 제기한 불신임안 표결 이후 선거가 실시되었다. 공공요금 인상과 부패 문제를 이유로 일본 중의원이 자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나카가와 히데나오 파벌 소속 자유민주당 의원 69명이 불신임안 표결에 기권하여 정부는 붕괴되었다.
중의원 선거가 참의원 선거와 같은 날 치러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1980년 일본 참의원 선거와 동시에 실시되었다. 여당 내 대립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는 예상치 못한 사태로 갑작스럽게 실시된 해산 총선거(돌발 해산)였다. 직전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실시되었으며,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 바카야로 해산까지 약 6개월에 이은 짧은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실시되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의 중참 동시 선거였다.
선거 기간 중 6월 12일 현직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사했다. 일본국헌법 제70조는 중의원 총선거 후 첫 국회 소집 시 내각 총사퇴를 규정한다. 이는 새 중의원 구성 시, 총리대신이 같더라도 내각은 새 신임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이다.[3] 한편, 70조는 "내각총리대신 부재 시" 내각 총사퇴를 규정한다.[4][5] 중의원 해산부터 국회 소집까지 "총리대신 부재 시"(총사퇴 사유 중복) 해석은 다음과 같이 대립한다.[6]
- 즉시 총사퇴
- 국회 소집 시까지 총사퇴 불필요
오히라 급사 당일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총사퇴했다(직무집행내각으로 이행, 국회 소집 시 총사퇴 생략).[7] 이는 총리대신 부재 시 즉시 총사퇴, 국회 소집 시 재차 총사퇴는 불가능하다는 해석(위 학설 중 전자)을 따른 것이다.[8]
오히라 사망으로 자민당은 차기 총리 후보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렀다. 총리 권한은 이토 마사요시 관방장관이 총리 임시 대리로, 총재 권한은 니시무라 에이이치 자민당 부총재가 총재 대행으로 직무를 담당했지만, 니시무라는 낙선했다. 이토는 당선되었지만 후계 총리를 사퇴, 당내 조정을 거쳐 스즈키 젠코 자민당 총무회장이 후계 총리 총재가 되었다(니시무라 재정).
현직 총리뿐만 아니라 같은 날 참의원 선거에서도 당선자의 과로사가 발생했다.
2. 3. 선거일
1980년 5월 16일, 일본 사회당이 제기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중의원 해산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정되었다.[11]이 선거는 직전 총선거로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실시된 것으로, (제25회 총선거부터 바카야로 해산까지 약 6개월에 이은) 매우 짧은 기간 만에 치러진 선거였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중참 동시 선거로 치러졌다.
선거 기간 중인 6월 12일에는 현직 내각총리대신인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3][4][5] 오히라의 사망으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총사퇴하고, 직무집행내각으로 이행했다.[7][8]
2. 4. 의석
511석2. 5. 선거 제도
2. 6. 유권자
만 20세 이상의 일본 국민으로 총 80,925,034명이었다. 이 중 남성은 39,171,128명, 여성은 41,753,906명이었다.선거권은 만 20세 이상의 일본 국민에게 주어졌으며,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의 일본 국민에게 주어졌다. 투표 방법은 비밀투표이며, 단기투표로 1표를 행사한다.
3. 선거 결과
이번 선거는 여당 내 갈등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어 갑작스럽게 치러진 해산 총선거(돌발 해산)였다. 직전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실시되었으며, 제25회 총선거부터 바카야로 해산까지 약 6개월에 이은 짧은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실시된 역사상 최초의 중참 동시 선거였다.
선거 기간 중 6월 12일에 현직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가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본국 헌법 제70조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 처음 국회가 소집될 때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중의원 총선거로 새로운 중의원이 구성되므로, 같은 인물이 총리대신에 지명되더라도 내각은 새롭게 신임 기반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이다.[3] 한편, 70조는 “내각총리대신이 부재할 때” 내각은 그 중핵을 잃게 되므로 당연히 총사퇴해야 한다고 규정한다.[4][5] 따라서 중의원 해산부터 국회 소집 시까지 “내각총리대신이 부재할 때”가 된 경우(총사퇴 사유가 중복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헌법 해석이 대립한다.[6]
- 즉시 총사퇴해야 한다.
- “내각총리대신이 부재할 때”이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국회 소집 시까지 총사퇴할 필요가 없다.
오히라 총리의 급사 당시, 제2차 오히라 내각은 즉시 총사퇴하고 (직무집행내각으로 이행하여 국회 소집 시 총사퇴하지 않았다).[7] 이는 내각총리대신 부재 시점에서 내각은 이미 형식상 총사퇴했고, 국회 소집 시 다시 총사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해석을 취한 것으로, 전자의 학설에 따른 것이다.[8]
현직 총리이자 총재인 오히라가 사망한 채 투표일에 돌입했지만, 자민당은 차기 총리 후보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선거전을 치렀다. 총리 권한은 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관방장관이 총리 임시 대리로, 총재 권한은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 자민당 부총재가 총재 대행으로 각각 직무를 담당했지만, 선거 결과 니시무라는 낙선했다. 이토는 당선되었지만 후계 총리를 사퇴하고, 당내 조정을 거쳐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자민당 총무회장이 후계 총리 겸 총재가 되었다(니시무라 재정).
현직 총리뿐만 아니라 같은 날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도 당선자의 과로사가 발생했다.
자민당은 불신임안에 반대했던 다나카·오히라 양 주류파와 구 중간파 의원들, 그리고 본회의에 출석하여 불신임안에 반대했던 반주류파 중 나카소네파 의원들을 1차 공인하고, 불참했던 반주류파 의원들은 2차 공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처음에는 분열 선거 양상을 보였으나, 선거 중이던 6월 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 급사하면서 자민당 주류·반주류 양 파는 화합·단결하여 보궐선거 양상을 보이며 선거전을 진행했다. 투표 결과, 자민당은 안정 다수를 넘는 284석을 획득하여 대승했지만, 부총재였던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와 전 법무대신 이나바 오사무(稲葉修)는 낙선했다. 동시에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추가 공인을 포함하여 과반수를 10석 이상 상회하는 69석을 획득하여 승리했다.[9] 불신임안을 제출했던 일본사회당은 현상 유지인 107석이었지만, 위원장 아스카다 카즈오(飛鳥田一雄)는 간신히 당선되었고, 서기장 타가야 신미쓰(多賀谷真稔)와 후에 총리대신이 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는 낙선했다. 공명당과 일본공산당은 대패했고, 민사당은 소폭 감소했으며, 신자유클럽은 의석을 두 자릿수로 회복했다. 이로써 6년간 지속된 衆參 양원의 여야 경합 상태는 완전히 해소되었다.
3. 1. 투표율
3. 2. 정당별 의석
4. 주요 정당 및 정치인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참여한 주요 정당과 정치인들은 다음과 같다.
4. 1. 자유민주당
- 당본부 총재: 오히라 마사요시
- 당본부 부총재: 니시무라 에이이치
- 집행부 간사장: 사쿠라우치 요시오
- 총무회장: 스즈키 젠코
- 정무 조사회장: 아베 신타로우
- 국회 대책위원장: 간마루 신
- 참의원의원 회장: 토쿠나가 마사토시
;파벌
여당 내의 대립으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는 예상치 못한 사태로 갑작스럽게 실시된 해산 총선거(돌발 해산)였다. 직전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부터 불과 8개월 만에 실시되었으며, 제25회 총선거부터 바카야로 해산까지 약 6개월에 이은 짧은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실시되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의 중참 동시 선거였다.
이 선거 기간 중 6월 12일에 현직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현직 총리 총재인 오히라가 사망한 채 중의원 선거 투표일에 돌입했지만, 자민당으로서는 누가 차기 총리 후보인지 명확하지 않은 채 선거전이 되었다. 오히라가 맡고 있던 총리 총재 권한에 대해서는 총리 권한은 이토 마사요시 관방장관이 총리 임시 대리로서, 총재 권한은 니시무라 에이이치 자민당 부총재가 총재 대행으로 각각 직무를 담당했지만, 선거 결과 니시무라는 낙선했다. 이토는 당선되었지만 후계 총리를 사퇴하고, 당내 조정을 거쳐 자민당 총무회장이었던 스즈키 젠코가 후계 총리 총재가 되었다(니시무라 재정).
4. 2. 일본사회당
일본 사회당은 중앙 집행위원장 아스카타 이치오를 중심으로 이번 총선에 임했다. 주요 당직자로는 중앙 집행 부위원장에 아구근등, 키타야마애낭, 시모타이라 쇼이치, 집행부 서기장에 타가 타니 신임, 정책심의회장에 무토 산지, 국회 대책 위원장에 전변성, 참의원의원 회장에 아구근등이 있었다.여당 내 분열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치러진 돌발 해산이었다. 직전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불과 8개월 만에 치러졌으며, 제25회 총선거부터 바카야로 해산까지 약 6개월에 이은 짧은 기간만의 선거였다. 이 선거는 역사상 최초로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와 동시에 실시된 중참 동시 선거였다.
선거 기간 중 6월 12일에 현직 내각총리대신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국헌법 제70조에서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 처음으로 국회가 소집될 때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의해 새로운 중의원이 구성되기 때문에, 설령 동일 인물이 내각총리대신에 지명되더라도 내각은 새롭게 신임의 기반을 얻어야 한다는 취지이다.[3]
총선 결과, 일본사회당은 107석을 획득하여 이전 선거와 의석수 변동이 없었다. 총 득표수는 11,400,748표였으며, 득표율은 19.31%였다.
4. 3. 공명당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공명당은 58석을 획득하였으나, 이전 선거에 비해 의석수가 감소하였다.
4. 4. 민사당
佐々木良作|사사키 료사쿠일본어 중앙 집행위원장 아래, 小平忠|고다이라 다다시일본어, 中村正雄 (政治家)|나카무라 마사오일본어, 向井長年|무카이 나가토시일본어 중앙 집행 부위원장, 塚本三郎|쓰카모토 사부로일본어 집행부 서기장, 大内啓伍|오우치 게이고일본어 정책심의회장, 永末英一|나가스에 에이이치일본어 국회 대책 위원장, 무카이 나가토시 참의원의원 회장, 春日一幸|가스가 잇코일본어, 西尾末広|니시오 스에히로일본어 상임 고문 체제로 운영되었다.
돌발 해산으로 불린 이번 총선에서 민사당은 3,896,728표(6.60%)를 득표하여 36석을 확보하였다.
4. 5. 일본공산당
일본 공산당|일본 공산당일본어은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의석이 크게 줄어 39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번 총선거에서는 이전 선거에서 잃은 의석을 회복하기 위해 129명의 후보를 공천했다.선거 결과, 공산당은 29석을 얻어 지난 총선보다 12석이 줄었다. 득표율은 9.83%였다.
당시 일본공산당의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4. 6. 신자유클럽
신자유클럽은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5명의 후보를 공천했으나, 12명이 당선되었다. 득표수는 1,766,396표, 득표율은 2.99%로, 이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비해 8석 증가했다.[1]4. 7. 사회민주연합
덴 히데오를 대표로 하는 사회민주연합은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의석수가 2석 증가하여 5석이 되었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3석으로 의석수가 감소하였다.[1]
5. 당선 의원
- 무소속 당선자는 보수계 9명, 중도계 2명이다.
- 신임 의원 35명 중 참의원 의원 경험자는 다음과 같다.
- 자유민주당: 이마에다 요시오, 우에다케 시게오, 우스이 히데오, 오타 세이이치, 오쿠다 미키오, 코와타 사부로, 카와사키 지로, 키타무라 요시카즈, 쿠마 아키오, 타카무라 마사히코, 코가 마코토, 사사야마 토시오, 치카오카 리이치로, 나가노 유야, 노가미 토오루, 하마다 타쿠지로, 히라누마 다케오, 모리타 하지메
- 일본사회당: 이가라시 히로조, 쿠시하라 요시나오, 코바야시 쓰네토, 조우지 토요시, 토다 기쿠오, 나가이 타카노부, 마츠모토 유키오
- 일본공산당: 오자와 카즈아키, 미노와 사치요
- 신자유클럽: 이시하라 켄타로, 카키자와 코우지, 키무라 모리오, 코스기 타카시
- 사회민주연합: 스가 나오토
- 무소속: 사쿠라이 아라타, 야스미치 미쓰야, 야나자와 하쿠오
- 전직 의원 44명은 다음과 같다.
- 자유민주당: 아오키 마사히사, 오하라 카즈미, 카와다 마사노리, 키베 요시아키, 키무라 무네오, 시마무라 요시노부, 스나다 시게타미, 세토야마 미츠오, 토이다 사부로, 토사카 시게지로, 토모나 타케토, 나가타 료이치, 나카니시 케이스케, 나카야마 토시오, 하토야마 쿠니오, 하야시 다이칸, 하라다 켄, 히라이즈미 와타루, 후지모토 타카오, 마에오 시게사부로, 마에다 마사오, 미이케 신, 모리 키요시, 요시노 겐
- 일본사회당: 아베 미키오, 이케하타 세이이치, 오시마 히로시, 카와모토 토시미, 사토 케이지, 스즈키 츠요시, 타나카 쓰네토시, 토가노 타이지, 히라바야시 고, 후쿠오카 요시토, 마츠자와 토시아키, 미즈타 미노루, 야마야마 유사쿠
- 공명당: 요시우라 추지
- 신자유클럽: 아마리 쇼, 이토 코우스케, 나카우마 히로키, 이다 미노루
- 무소속: 나카가와 히데나오, 마츠노 요리조
- 낙선 등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의원은 74명이다.
- 자유민주당: 이나바 오사무, 이하라 기스타카, 오시로 마사스미, 오츠보 켄이치로, 나카지마 마모루, 니시무라 에이이치, 니시다 쓰카사, 후쿠케 슌이치, 마스오카 히로유키, 무라카미 시게토시, 야마구치 시즈에, 와타나베 마사로
- 일본사회당: 이시노 히사오, 카와사키 히로지, 칸자와 조, 키하라 미노루, 코노 마사시, 코다마 스에오, 사이토 마사오, 시바타 켄지, 시부자와 토시히사, 니이무라 게이고, 타가야 신넨, 타바타 마사이치로, 호소야 아키오, 혼고 코이, 마츠우라 토시나오, 미야케 쇼이치, 무라야마 도미이치, 야스다 슈조, 야마다 요지
- 공명당: 아라이 아키유키, 이다 타다오, 이케다 카츠야, 오미 에키오, 오가와 신이치로, 코하마 신지, 카이누마 지로, 키우치 요시아키, 곤도 츠네오, 사카구치 치카라, 세노 에이지로, 타카하시 시게루, 타니구치 세키오, 나카가와 요시미, 하세오 유키히사, 하야시 타카노리, 후쿠야 슈지, 후타미 노부아키, 후루카와 마사시, 마츠모토 추스케, 미야지 마사스케, 모리타 케이이치, 야마다 에이스케, 요시이 미츠테루, 와다 이치로
- 일본공산당: 이노우에 아츠시, 우메다 마사루, 칸자키 토시오, 키노시타 겐지, 쿠도 아키라, 시바타 무츠오, 쇼지 코스케, 타다 미츠오, 츠가와 타케이치, 나카가와 리사부로, 나카바야시 케이코, 노리타케 신이치
- 민사당: 카와무라 마사루, 코다이라 타다시, 나가에 카즈토
- 무소속: 타나카 미치코, 하시모토 토미사부로, 야스다 준지
야마구치 시즈에의 낙선으로 자유민주당에서는 여성 국회의원이 없게 되었으며, 이 공백은 1993년 제40회 중의원 선거에서 타나카 마키코와 노다 세이코가 당선될 때까지 이어졌다.[1]
5. 1. 지역구별 당선 의원
참조
[1]
뉴스
1980年衆参同日選 異例の「ハプニング解散」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6-08-04
[2]
Youtube
衆院解散、総選挙へ -大平内閣不信任案を可決 -No.1375_2
https://www.youtube.[...]
中日映画社
[3]
서적
憲法 第三版
弘文堂
1995
[4]
서적
憲法 第三版
弘文堂
1995
[5]
서적
現代行政全集 1 政府
ぎょうせい
1983
[6]
서적
注解法律学全集3 憲法III(第41条~第75条)
青林書院
1998
[7]
서적
注解法律学全集3 憲法III(第41条~第75条)
青林書院
1998
[8]
서적
新版 憲法(下)
有斐閣
1984
[9]
Youtube
昭和55年6月 中日ニュース No.1380_2「自民党、圧勝 -衆院ダブル選挙-」
https://www.youtube.[...]
中日映画社
[10]
간행물
『官報号外』昭和58年3月11日 第98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1号
https://kokkai.ndl.g[...]
[11]
서적
헌법 제3판
히로후미당
1995
[12]
서적
헌법 제3판
히로후미당
1995
[13]
서적
현대 행정 전집 1 정부
일탓
1983
[14]
서적
주해 법률학 전집 3 헌법Ⅲ( 제41조~ 제75조)
청림서원
1998
[15]
서적
주해 법률학 전집 3 헌법Ⅲ( 제41조~ 제75조)
청림서원
1998
[16]
서적
신판 헌법(아래)
유비각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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